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뤽 고다르 (문단 편집) == 일생 == 그는 부유한 [[파리지앵]]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그에게 [[독일]]의 낭만시, 이해하기 어려운 프랑스 소설들을 읽게 했다. [[2차대전]] 동안은 스위스의 가족 저택에서 지냈다. 전후 파리로 돌아온 그는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를 중심으로 한 영화 클럽에 가입했다. [[프랑수아 트뤼포]]나 [[클로드 샤브롤]], [[앙드레 바쟁]], [[에릭 로메르]] 등과 같은 사람들을 만나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했다. 이들은 3년간 약 2천 여편이 넘는 영화를 보며, 열띤 토론을 볼였다. 오후 내내 영화를 다섯편이나 보면서, 각 장르마다 스타일과 형식을 이해하려 노력'''했'''다.[* 고다르는 이러한 특성들을 이해하지 못 해 장르적이지 않은 영화를 찍은 것이 아니라, 그런 기존 영화들이 단순화하여 답습하고 있던 스타일로부터 탈피하기 위해 자신의 영화관을 구축한 것으로 봐야한다. 이런 태도는 고다르 영화 전체의 태도나 다름 없음을 기억해야할 필요는 있다. 애당초 기존 장르 영화들을 분석했다고 해서 그것들과 똑같이 찍을 필요는 '''당연히 없다.'''] 그리고 자기가 분석한걸 [[카이에 뒤 시네마]]에 기고했다. 원래 [[카이에 뒤 시네마]]라는 영화 잡지의 평론가였다. 집세를 내기 위해 친척들이나 동료 직원들의 '''돈을 훔쳤다.''' 이 때문에 고다르의 아버지는 보석금으로 아들을 꺼내서 잠시 정신요양원에 보냈고, 그는 이 사건으로 부유한 집안과 결별하게 된다. 그뒤로 스위스의 댐 공장에서 일했다.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이 댐공장에서 일할 때 찍은 영화가 그의 첫 영화 '콘크리트 작전(Operation Beton, 1954년작)'이다. 그는 평론가를 하면서도 영화를 만들 마음이 있었다. 그랬기에 이후 자신이 영화를 찍을 때를 대비해 사실상 견습용으로 만들게 된 것인데, 그런 의미로 찍은 다큐멘터리 영화라 대단한 내용은 없고 댐 공장에서 어떤 식으로 건설일을 하는지 담은 정도이지만, 자세히 보면 그 이후 나온 수많은 영화들에서 보여지는 고다르 특유의 나레이션과 편집 방식의 기미가 조금 느껴지기는 한다. [[20세기 폭스]]의 파리 지사에서 언론 홍보로 일하기도 했다. 1960년에서 1968년까지 14편이나 만들었지만, 금전적 수익을 가져온건 하나도 없었다.[* 큰 돈을 벌지 못했다는 것이지, 흥행을 아예 못하기만 했다는 것은 아니다. 몇몇 영화는 예술적 평가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68혁명]]의 전조를 보이던 당시 프랑스의 흐름을 타 예술 영화치고 굉장히 흥행했다. 그러나 그 번 돈으로 다음 영화를 제작할 만큼의 수준이 안 된 건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가 영화를 계속 만들 수 있는건 [[프랑스]] 정부의 재정 지원이 있기 때문. 프랑스는 예술을 중요시해서 그를 비롯한 영화 감독들에게 재정 지원을 해준다. 결코 충분한 재정 지원을 받은 건 아니다. 그와 그의 동료들은 제작비가 부족해 전문 음향기사를 구하지 못한 적도 있어 영화에 쓸, 일상 생활 소음과 효과음을 녹음하기 위해 종종 아파트 아랫집에 몰래 녹음 장치를 갖다대고 청소나 설거지하는 소리, 그러면서 그 집 아줌마가 중얼거리는 소리 등을 [[도청(범죄)|몰래 녹음]]하기도 했다. 실제 프랑스 정부가 영화인들에게 하는 재정 지원 기준은 [[시나리오]]인데 영상과 음향 충돌 및 조화로 그 가치를 인정받는 고다르의 영화 스타일상 내러티브와 스케일 정도만 알 수 있는 시나리오만으로는 영화를 대부분 제대로 보여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위대한 영화인이고 당시 프랑스가 먼 과거부터 예술을 대하는 태도가 좋은 나라라 해도, 시나리오를 중점적으로 가치를 평가하는 영화에 대한 근본적 보수성은 어쩔 수 없었기에 그에게 많은 지원을 해주지는 않았다. 1960년 '[[네 멋대로 해라]]'로 [[쿠엔틴 타란티노]] 수준의 충격적인 데뷔를 한 뒤, 수많은 영화를 발표했다. 대본 없이[* 정확히는 스토리보드가 없다는 게 맞다. 단지 그의 시나리오가 전통적 영화 제작의 관점에서 디테일이 많이 부족한 정도라 무시당할 뿐, 분명히 기본적 시놉시스와 시나리오는 있었다. 물론 대본에 없는 장면이나, 대본과 다르게 찍은 장면도 꽤 있다 하지만. 일단 스토리보드는 없었고 시나리오는 있었다.] 찍었으며, 점프컷을 자주 사용한걸로 유명하다. 초창기에는 1930년대 헐리우드 영화에 영향을 받은 듯한 스토리와 파격적인 연출의 영화라면, 이후 영화는 [[마르크스주의]]와 [[68운동]]에 경도되면서도 팝 아트적인 스타일리시를 공유하는 영화를 보여준다. 이후 지하 세계로[* 단적으로 필름을 버리고 비디오로 촬영했다.] 파고 들어가 특이한 영화들을 줄창 만들어 냈다.[* 이 시기는 진짜 하드코어한 영화 매니아들만 볼 수 있는 영화들로 이뤄졌다.] 그러나 혁명과 투쟁 정신이 더 이상 세상을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만 고다르는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인생)'로 지하 세계에서 벗어나 다시 상업 영화계[* 잘 팔리는 영화라는 얘기가 아니라 구경거리로서의 영화, 즉 자본에 의해 돌아가는 영화를 말한다.]로 돌아왔고, 그 이후에는 정치색을 약화시키고 좀 더 예술성에 경도된 영화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사실 그의 영화는 보는 재미가 거의 없는 편이다. 그래서 영화학도들에게는 가히 [[윌리엄 셰익스피어]] 같은 존재다. 위대하기도 하지만 지루함과 짜증감도 안겨주기 때문. 그러나 [[정성일]]은 고교 시절 고다르의 영화 '기관총 부대'를 프랑스 문화원에서 처음보고 세상이 뒤집히는 듯한 충격을 받고, 고다르 영화를 한편이라도 더 보려고 계속 프랑스 문화원 상영회에 참석했다고 한다. 심지어 순수 영어 자막 뿐이라 정확히 뭔 내용인지도 몰랐음에도 그 카메라의 움직임들을 따로 느낀 순간 그것만으로 기쁘고 재미있었다 한다. 그래도 현대 영화를 이야기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사람 중 하나이다. 그는 영화란 "현실, 그리고 그로부터 파생된 문학과는 다른, 또한 다른 예술 장르와는 구별되어야 할 고유의 장르"라는 개념에 충실하였다. 영화사에 가장 강한 혁명을 보여준 사람인 것이다. 그리하여 촬영을 계획하며 렌즈를 선택할 때도 그 영화만의 속성이 부각되는 방식을 끊임없이 고민하였다. 미국 한 대학에서 강연할 때, 한 학생이 그를 가리켜 "우리에게 그는 [[밥 딜런]]과 마찬가지로 절대 누구와도 대체할 수 없는 존재"라고 말했다. 안타까운 부분은 그의 뜻을 제대로 이어받는 후계자가 없다는 것이다. 사실은 그럴 사람이 있었는데, 단순 육체노동자 출신으로 고다르의 연출부 생활을 시작하여 조연출까지 하다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 '장 외스타슈'(Jean Eustache)라는 감독이다. 그는 '포스트 [[누벨바그]]'라 불리며 그의 혁명 후계자로 인정받기 시작한 상태였다. 고다르와 누벨바그의 동료들도 인정한 훌륭한 작품[* '엄마와 창녀'라는 유명한 작품으로 칸 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했다.]도 어느 정도는 남겼는데, 자금 사정 때문에 대부분 단편 영화였고 장편은 단 두 편 뿐이다. 안타깝게도 더 예술 세계를 뻗어가야 할 시점에 장기간 생활고에 시달려[* 당시 [[68혁명]]이 끝난지 꽤 시간이 흘러 [[누벨바그]]의 흐름 역시 힘을 잃고 그 성향의 영화들이 점점 흥행력을 가지지 못하게 되었었다. 그래서 그의 영화 역시 흥행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40대 중반이라는 젊은 나이에 자살[* 프랑스 영화계에서는 이는 단순한 생활고 탓이 아니라 부인의 자살로 충격 받아 우울증에 걸린 영향이 더 크다는 소문이 있다. 생활고도 있었으나, 으스타슈는 영화인이 되기 전 젊었을 때 막노동이나 청소부도 하면서 더 힘든 경제적 상황도 많이 겪은 편으로 알려져 있어 단순 생활고 탓이라 보기 힘들다. (다만 핵심 요인인 건 확실한데, 상속받은 아들이 부모의 자살에 상당히 충격을 받아 판권비를 높게 불렀고 으스타슈 영화는 오랫동안 봉인 상태였다고 한다. 2022년에야 재공개했을 정도.) 실제로 으스타슈가 자살하기 몇년 전에 그의 부인이 자살했는데, 소문으로는 남편 으스타슈가 만든 영화 '엄마와 창녀'를 보고 자신과 남편 관계의 심연을 깨닫고 큰 충격을 받아 [[우울증]]에 걸려 견디지 못했기 때문에 자살한 것이라고 한다. 물론 자세한 진상 조사를 할 수 없는 부분이라 명확한 사실을 알 수는 없지만, '엄마와 창녀'의 내용을 생각해 보면 유추는 가능하다.][* 제목을 보면 진짜 엄마와 창녀가 나올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런 내용이 아니고 한 남자 주인공과 그와 육체적, 정신적 내연관계에 있는 두 여자 주인공의 소통에 대한 이야기이고, 남자 주인공이 각각의 여성의 집에 찾아가 침대에 둘이서 함께 누워 대화하는 장면이 대부분인데, 여기서 적나라한 남녀관계의 속마음 같은 것이 대사로 나온다. 말하자면 한 여자 주인공은 남자 주인공의 '엄마'(정신적 남녀관계)의 비유되는 역할, 다른 한명은 '창녀'(육체적 남녀관계)에 비유되는 역할이라는 뜻이다.(그러나 실제로 창녀처럼 다룬다거나 하는 내용은 없다.) 이 영화의 가치가 인정받는 것도 그 대사 내용들이 프랑스어 특유의 뉘앙스와 어우러져 예술적이라는 평가를 받았기 때문인데, 어쨌거나 내용이 적나라한 부분이 있고 그것이 자기 남편이 만든 영화이고 자기와의 관계와 닮은 부분을 찾았을 수 있으니 어떤 성격의 여성이든 혹은 사람이든 정신적 충격을 받을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영화 흥행이 안 돼 생긴 생활고'와 '아내의 자살로 생긴 우울증' 두가지가 다 작용된 것으로 보는 게 일반적이다.] 을 선택했고, 결국 그로 인해 제대로 된 후계자의 역할을 다 하지 못하고 영화 인생을 마감하게 된 것이다.[* 그는 누벨바그 감독 중 유일하게 지식인이 아닌 노동자 계급 출신으로 누벨바그의 흐름에 가장 걸맞는 사람이었고, 가장 그 계급의 내면을 잘 담아낸 부분도 인정받는 작가이다.] 고다르도 이를 안타깝게 생각하였다. 물론 그가 남긴 몇몇 작품만으로도 훌륭하다는 평가는 받으나, 70편이 넘는 영화를 만들어낸 고다르처럼 그가 긴 영화 인생을 이어가지 못한 것은 포스트 누벨바그의 움직임을 단편적으로 만든 중요한 요인이고 안타까운 점이다. 영화 감독을 작가로 칭한 최초의 사람들 중 한 명이기도 하다. 그가 인정한 최초의 작가 감독은 할리우드 스릴러의 대가 [[앨프리드 히치콕]]이다. 정작 당시 히치콕이 왕성하게 활동하던 미국이나 영국에서는 영화 감독이라는 자리는 단순히 '영화 찍는데 필요한 기술자들을(촬영, 조명, 음향, 미술 등) 감독하는 관리자' 정도의 인식이었다.[* 히치콕 자신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가장 좋아한 영화 감독은 일본의 [[미조구치 겐지]]라고 한다.[* 당연히 그도 고다르가 작가 감독으로 인정한 사람 중 하나이다.] 어떤 기자가 그에게 가장 좋아하는 영화 감독 3명이 누구냐고 묻자 '미조구치, 미조구치, 미조구치'라고 말하고 자리를 떴다고 한다.[* 이와 같은 사례로 전설적인 걸작 [[시민 케인]]을 만든 [[오손 웰스]]는 영화 기자가 좋아하는 영화 감독 세명을 물었을 때 영화의 신 [[존 포드]]의 이름을 3번 말하고 간 적이 있다.] 미조구치 겐지가 살았거나 영화 촬영한 지역을 보기 위해 일본 여행을 간 것이 일본 내에서도 화제가 되었고 지금도 고다르가 방문한 지역 중에는 그가 와서 찍은 사진들을 전시해놓은 경우도 있다. 그만큼 그의 영화를 좋아한 걸로 보인다. "미조구치는 '크레인 숏'을 만든 것이나 다름없다."고 할 정도로 미조구치 겐지의 영화에서 크레인 숏 방식으로 찍은 롱테이크 장면들을 좋아했다고 한다. 실제 고다르 영화에는 미조구치 겐지의 카메라 워킹을 [[오마주]]하여 촬영한 장면들이 꽤 있다고 한다. 대표적인 것은 영화 [[미치광이 피에로]]의 마지막 엔딩 장면[* 주인공이 절벽에서 자기 얼굴에 폭약을 대량으로 두르고 스스로 불을 붙여 자폭하는데, 자폭하는 순간을 보여줄 때 익스트림 롱 숏으로 굉장히 멀리서 찍는다.]이다. 미국 감독으로는 [[니콜라스 레이]]를 가장 좋아한다고 한다. 평론글에 '영화는 니콜라스 레이다'라는 말을 한 적도 있다고 한다. 이탈리아 페이크 다큐멘터리 영화 알제리 전투가 베네치아 국제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으며 대상인 황금사자상을 받자 다른 프랑스 영화인들과 같이 반발하여 즉각 퇴장한 바 있다.[* 당시 프랑스 영화인은 한 사람 [[프랑수아 트뤼포]]만 남아 손뼉을 치면서 축하해주었다. 그리고 트뤼포는 프랑스 언론에게 엄청나게 비난당했지만 본인은 신경도 안 썼다.] 2000년 초반, 한국 인터넷에서 그가 잠을 자다 급사했다고 헛소문이 나와 많은 사람들이 낚인 바 있다. 몇몇 예술 영화 동호회 모임에선 그의 죽음을 기리며 명복을 비는 건배를 했다. 이 낚시가 통한 게 1999년 잠을 자다 갑자기 급사한 [[스탠리 큐브릭]]이 죽은 지 얼마 안되어서였다.[* 거기다가 큐브릭과 고다르는 나이대가 비슷하다. 큐브릭이 두 살 형이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말년고다르.jpg|width=100%]]}}} || || '''{{{#fff 말년의 모습}}} ''' || 2022년 9월 13일 만 91세의 나이를 일기로 사망하였다.[[https://www.liberation.fr/culture/cinema/mort-de-jean-luc-godard-histoire-du-cinema-20220913_4CZHL3TCIZELDKSELOABOVFREM/?utm_medium=Social&xtor=CS7-51-&utm_source=Twitter#Echobox=1663056258|#]] 사망 전 은퇴작이 될 영화가 있다는 뉴스가 떴으나 사망 당시엔 별다른 정보는 없었다. 2023년 3월 조력자가 밝히길 공식적인 은퇴작으로 기획된 Funny Wars와 Scenario는 물론 이외에도 작업해둔 영화가 있다고 한다. 사후 공개 형식으로 계속 풀릴 것으로 보인다. [[https://www.critikat.com/panorama/entretien/godard-par-brenez/|출처]] [[조력 자살]]로 영면하였는데[* 고다르가 살던 스위스는 [[조력 자살]]이 허용되는 나라다. 이미 2014년 [[제67회 칸 영화제]] 관련 인터뷰에서도 조력 자살에 대해 묻자 긍정적인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딱히 아프지는 않고 삶에 지쳐서 선택했다고 한다. [[https://www.worldofreel.com/blog/2022/9/qsh7r5udb40vmxa2qyqwer5kwjs41t|#]] 장례식은 따로 열지 않고 화장했다고 한다. 그의 은퇴작이자 유작 Funny Wars가 [[제76회 칸 영화제]]에 상영될 예정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